브레베 종류 : 대전 400KM 브레베 (획득고도 4,440m)
출발시각 : 2019.05.04. / AM08:00
완주시간 : 21h. 37min.
자전거 : Addict10 (2015) + Dynamo front wheel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 투어링 바이크로 친구와 함께 무박 부산(이하 무부)에 도전한 적이 있다. 400km 이상을 달린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새벽에 극심한 추위와 컨디션 조절 실패, 그리고 졸음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번 경험해 본 라이더는 알겠지만 서울에서 부산으로의 이동은 전체적으로 고도가 내려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거리 대비 난이도 자체는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힘들었던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번 대전 400km 또한 녹록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안 200km 때 오버 페이스로 고생한 뒤, 서울 300km에서는 마이페이스의 솔로 주행을 통해 어느정도 초장거리 라이딩에 대한 감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400km는 또다른 영역이었다.
역시 완주하고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마다 기준과 목표가 다르겠지만 올해는 너무 빨리 달리려 하지 않고 몸에 데미지를 최소화하여 완주하는 방법을 몸에 익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데이터를 쌓아가 내게 맞는 주행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 하나의 큰 과제란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브레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미리 개최 지역으로 이동해 숙박을 하게 된 날이었다. 발품 팔고 가격 흥정 같은 것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미리 인터넷에서 출발지와 가깝고 저렴한 숙소를 알아보고 갔다. 모텔 관리인이 흔쾌히 자전거의 객실 반입을 허락해 주어 근심걱정 없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대전400 출발지가 숙소와 1분 거리였기에 한 시간 전에 일어나 느긋하게 준비했다. 출발 5분 전에 파르마 바이시클샵에 도착하여 브레베 카드를 수령하고 출발 신호를 기다렸지만 8시가 되어도 아무런 얘기가 없다. 눈치를 살피다 결국 각자 알아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허술함은..? 일제히 파이팅 넘치게 출발하는 느낌을 좋아하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CP1까지는 100% 팩 라이딩으로 이루어졌다. 다리가 싱싱한 초반인데다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 이동 속도가 제법 빨랐다. 가볍게 인사나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고, 열심히 해서 완주하자는 고양감도 들기 때문에 즐거움이 넘치는 구간인 것 같다. 본인은 이 구간에서 많은 참가자의 자전거와 세팅이 어떠한지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느끼는 편이다. 요즘 부쩍 카본 휠이 갖고 싶어서 그런지 특히 휠셋에 눈이 갔다.
출발 직후 신호가 많은 도심 구간에서 나름 주의하여 이동했지만, 이번 브레베에서도 역시 좌회전 신호를 한 번에 받아 들어가려고 하는 아쉬운 장면이 목격된다. 팩을 이끄는 선두가 범칙을 하게 되면 군중심리로 알면서도 자연스레 따라하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차량이 많거나 위험 구간에서는 삼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종시로 향하던 중에 만난 도로 한복판에 위치한 자전거 길은 좀처럼 보지 못한 형태의 것이었기에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노면의 상태가 아주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내가 사는 지역의 영산강 자전거길에 비하면 실크로드마냥 쾌적했다. 도로 중앙에 위치하므로 양옆에서 차 소리가 시끄럽게 나는 점이 다소 아쉬웠으나 차량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는 점은 라이더에게 있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앞사람 꽁무니를 쫒아 넋 놓고 달리다보니 제법 일찍 CP1에 도착할 수 있었다. CP1까지는 40km가 채 안됐고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와서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무보급으로 다음 CP까지 가기에는 애매한 것 같아 준비해 온 아미노바이탈 한 팩과 포도당 캔디 한 알 정도만 챙겨먹고 바로 출발했다.
CP1을 떠나고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길래 굉장히 일찍 솔로 라이딩이 시작됐구나 싶었는데, 조금 더 진행하니 저 멀리 신호를 받고 기다리는 그룹 하나가 보였다. 팩의 성격이 어떨지 모르지만 드래프팅 효과는 그룹 라이딩이 주는 최대의 은혜이기 때문에 일단 붙고나서 생각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힘을 썼다. 페이스가 빠르면 놓아주고, 느리면 앞서가면 되므로 선택은 본인 몫이다. 최근에 와서야 익숙해진 타임트라이얼 자세로 강하게 페달링을 했고, 곧 합류할 수 있었다.
후미에 붙어 그룹을 관찰해 보니 남성 랜도너 한 분이 주야장천 끄는 말뚝선두 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페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언덕에서 인터벌을 걸지 않아 편안한 주행이 가능했다. 선두 교대를 해드릴까도 싶었지만 소심쟁이라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CP2 직전에 있는 백마령 업힐에서 팩이 분리 됐고 「먼저 가실 분은 가세요~」라는 말에 업힐을 좋아하는 나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팩에서 빠져 나왔다. 팩과 점차 멀어지자 이내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체인이 짜르르 기분 좋게 돌아가는 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고요함 속에서 업힐을 즐기며 마지막 헤어핀을 도는데 정상에서 막 다운힐에 진입하는 라이더 두 명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 오래 전부터 써왔던 여행용 다이나모 휠의 구름성이 좋지 못하고, 다운힐 실력도 그저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리막에선 무리하게 붙으려고 욕심 부리지 않았다. 다리에 쌓인 젖산을 풀어주며 안전하게 다운힐을 내려온 뒤, 평지 구간에서 힘을 써 앞 그룹에 붙었다.
이번 그룹은 외국인 랜도너 둘이서 주도하는 팩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중 한 명은 서울300km 때 자주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반가웠으나 낯가림이 심해 말을 건네진 못했다. 다음 CP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여서 새 그룹과의 라이딩은 아쉬워 할 틈도 없이 금세 끝이 났다.
CP2는 굉장히 작은 편의점이었다. 소변이 급해 근처에 화장실 있는지 물어보니 점원도 잘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점원들은 화장실을 어떻게 해결하는 걸까? 90km 넘게 달려오는 동안 화장실을 단 한 번도 가지 않아 안장에서 내려오고 나서부터 소변이 마려워 몸이 베베꼬여 왔다. 빨리 화장실을 찾아 떠나고 싶었지만 다음 CP까지의 거리가 70km 이상 있었기 때문에 급한대로 샌드위치와 우유를 흡입하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화장실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가는데 CP2까지 긴 시간 함께 했던 팩을 다시 만나게 됐다. 지금 붙으면 아쉬움에 페달링을 놓지 못할 것 같아 단념하고 눈 앞에 보이는 주유소 화장실에 자전거를 세우고 볼 일을 봤다. 급한 불이 꺼지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몸에 힘이 넘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이 가벼워져 타겟파워를 250와트 정도로 올려잡고 달리다보니, 아까 떠나 보냈던 그룹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들 CP2 편의점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라 갈비탕을 먹으러 간다며 시내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결국 5분도 함께하지 못한 채 이내 다시 솔로로 돌아왔다.
CP2 직전 외국인 그룹도 그랬고, 헤어짐이 이렇게 빠르다니 유난히도 고독한 브레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팩라이딩이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두 번 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체념하고 솔로라이딩을 계속해 갔다. 400km는 익숙치 않은 영역이었기에 초반에 시간을 아껴두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흐름 상 앞에 달리고 있는 라이더들도 많지 않은 듯 했고, 서울300 때도 CP2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랜도너 중에는 보급 시간과 장소, 구간 별 페이스 등 꽤 세밀히 계획해 오시는 분도 있으나 나는 CP 간의 거리와 획득고도 위주의 대략적인 코스 성향만을 머릿속에 넣어오는 편이다. 그래서 CP3와 CP4 사이에 뾰족 솟은 업힐 두 개가 있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CP2와 CP3 사이의 업힐 구간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해당 구간의 힐클라임을 시작하게 됐다. 이 업힐 구간에서 선행 하던 2인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평지, 다운힐은 영 시원치 않지만 그나마 힐클라이밍에 강한 스타일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혼자 달리다 사람을 보니 반가웠다. 젊은 2인조 그룹이었는데 팩을 꾸려볼까도 싶었지만 업힐이 얼마나 남은지 모르겠고 어짜피 다운힐이나 평지 구간에서 잡힐 것을 알고 있었기에 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했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해가 중천에 올라 기온이 30도를 넘기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안좋은 습관이 있는데 업힐에서 땀을 많이 흘리다보니 더위를 먹어 급격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무정차로 다음 CP까지 가려고 했지만 당도 떨어지고 갈증이 나서 다운힐 후에 처음 눈에 들어온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가게 앞에 서서 먹고 있는데 아까 업힐에서 지나쳤던 2인조 그룹도 내려와 내가 쉬고 있던 편의점에 보급하러 들어왔다. 분위기를 보니 이분들도 오래쉬지 않고 출발할 것 같아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갈까요?」 라고 용기내어 말을 건네 보았다. 흔쾌히 수락 받고 출발은 같이 했으나 한번 맞은 봉크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월악산 업힐까지만 같이하고 다운힐에서 그들을 먼저 보내주게 되었다. 내가 봉크 상태인지의 여부는 심박계와 파워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힘을 줬을 때 파워는 높은데 심박이 올라가지 않으면 연료가 고갈 됐다는 뜻이다.
다운힐을 하며 월악산의 경치를 만끽했다. 월악산은 진경산수화에서 표현 된 바위산마냥 수려하면서 웅장했다. 경치를 즐기며 한참을 잘 가던 중 갑자기 휠에서 탕탕탕 하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설마 스포크가 나갔나 싶었는데 원인은 다이나모 라이트의 마운트에 있었다. 노면에서 올라오는 충격이 누적되어 피로파괴가 된 모양이었다. 마운트 소재가 플라스틱이라 내구성이 괜찮은지 의심이 가서 테스트 라이딩도 갔다 왔었는데 낭패였다. 그래도 야간 라이딩 중에 부러지지 않고, 밝을 때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라이트는 브레이크 암에 끼워 포크에 고정하는 타입이었는데 당장 고정 할 만한 도구가 없어 대롱대롱 매단 채 다음 CP까지 조심히 이동했다. 휠 스포크에 말려들어갈 수 있으므로 단차와 홀에는 특별히 주의했다.
CP3에 도착하니 먼저 와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는 랜도너 한 분이 계셨다.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정황상 그분이 현재 가장 선두에 계시는 분인 듯 했다. 오기 전에 잠시 함께 했던 2인조는 CP 전의 중국집에서 밥을 먹는다고 했기 때문에 아마 맞을 것이다. 덩치가 굉장히 크신 분이었는데 업힐도 순수파워로 조져버리며 오신건지 페이스가 굉장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분께서 1착으로 완주 하셨다고 한다.) 대전 분이셔서 코스 또한 잘 알고 계셨다. 업힐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곧 오르게 될 빗재가 이 주변에선 유명하고 재밌는 업힐 코스라고 소개해 주셨다. 일직선으로 길게 쭉 뻗은 고경사 업힐 코스로 밤에 오면 정상의 불빛이 그렇게 멀게 느껴진다고 한다. 원래라면 그 소릴 듣고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지금은 파손된 마운트 문제로 머릿속이 꽉차 반 공황 상태였다. 하지만 마음씨 고운 편의점 점원의 도움으로 다행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찾고 있는 케이블 타이가 안보여 우선 테이프로라도 고정을 하려고 3M 제품 것을 하나 집어 계산대로 들고 갔다. 혹시 못찾은 것이 아닐까 싶어 케이블 타이는 안파는지 여쭤보자「팔진 않는데 매장에서 쓰던 게 있어서요.」라며 몇 개 가져다 주셨다. 안판다고 딱 잘라 말하고 무시할 수 있었을텐데 정말 고마웠다. 곧 이어 도착한 외국인 랜도너 두 명에게도 친절하게 쓰레기통 위치나 가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화장실 위치를 직접 나와 설명해주시는 모습으로 보고, 세상에 이렇게 친절한 점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이 전혀 없었지만 약발이라도 받아보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 하나와 그나마 억지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레토르트 미역국을 하나 구매했다. 미역국을 전자렌지에 넣어 돌려놓고 밖으로 나와 응급조치를 했다. 케이블 타이로 핸들바에서 내려오는 케이블에 마운트를 묶어 고정시키고 테이프로 보강을 했다. 미세조정이 불가능해서 라이트가 조금 위를 향하게 됐는데 야간에 마주오던 차들에게 눈뽕을 줬을 게 뻔하므로 마음이 불편했다. 이 라이트가 눈뽕이 없는 기술(IQ technology)로 유명한 독일 B&M사의 라이트였는데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해 참 안타까웠다.
수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 탓에 나중에 도착했던 외국인 랜도너 두 명을 먼저 보내고나서야 출발하게 됐다. 결국 미역국도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는데 연료통이 빈 상태로 대전400의 최대 난관인 빗재와 벌재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걱정됐다. 좀비처럼 꾸역꾸역 올라가기야 하겠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빗재와 벌재는 경사도도 세고, 어두워지면 다운힐에서 속도를 못내 타임 로스가 많이 발생하므로 밝을 때 내려와야 한다는 얘길 CP 등지에서 접했었다. 다행이 업힐 구간 전부 끌바를 해서 올라가도 해 지기 전엔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아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멀리 가버렸을 줄 알았는데 빗재 업힐 초입에서 먼저 출발했던 외국인 2인조를 다시 따라잡게 됐다. 서로 영어로 얘길 나누며 느긋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슬그머니 옆을 지나쳐 가자, 「Wow. You're killing me.」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다는 표정을 짓자 「You are so fast.」 라고 고쳐 말했다. 킬링 어쩌고 하길래 뭐 잘못했나 싶었는데 안심했다.
혼자였으면 그냥 힘들고 고독한 업힐이 됐겠지만 뒤에 두 사람이 있다는 걸 의식하니 괜히 힘이 났다. 너 참 빠르구나 라는 말을 방금 들었는데 힘이 다해 끌바라도 하게 되면 그것만큼 창피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직전 브레베(서울300)에서 업힐 끝판왕인 화악산을 경험했던 터라 빗재는 그렇게까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라는 의미이지 힘들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카세트는 서울300과 마찬가지로 32t를 끼우고 왔다. 기어를 풀이너로 내려 다리에 가는 부하를 줄이고 산소를 많이 받아들이며 올라가야 하는데, 일명 '업힐 벌레'의 엄습으로 숨을 잘 쉴수가 없었다. 입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얼굴 주변을 수 십 마리가 알짱거렸지만 고경사라 속도 자체가 10km/h 안팎으로밖에 나지 않아 뿌리칠 수 없었다. 버프를 고쳐 썼음에도 고글 안으로 들어오거나 얼굴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왼손으로 벌레들을 훠이훠이 물리치며 겨우 빗재 정상에 다달았다. 정상의 쉼터 바로 옆에 화장실이 보여 들렀다 가려고 자전거를 세우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쪽의 외국인이 곧바로 뒤따라 올라온 것을 봤다. 인기척이 없었는데?! 놀랐던 것은 정상에서 그대로 U턴하여 뒤처진 동료를 마중 나갔던 점이었다. 그렇게 느린 페이스로 올라오진 않았는데 내 전투력을 알아보러 온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 여유가 대단했다.
헤어핀이 많지 않은 빗재 다운힐을 시원하게 내려왔는데 바로 뒤로 벌재 업힐이 기다리고 있었다. 빗재에서 간당간당하던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린 탓에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달리다보니 마을회관 같은 곳이 보여 이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자전거는 도로 옆에 쓰러뜨려 놓고 나는 계단 밑의 테이블로 내려와 나무 의자에 누워 아미노바이탈 한 팩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일 준비를 했다. 그때 뒤에 있던 외국인 두 명이 지나가길래 손을 흔들며 파이팅을 외쳐주고 나는 쪽모자로 태양을 가리고 20분 간 휴식을 취했다. 총 휴식시간을 20분으로 잡았으면 그 중 10분만 제대로 자도 잘했다고 보는데 타이밍 안좋게 옆에서 마을 방송이 시작돼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누워있는 것만으로 불편했던 속이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20분을 꾹꾹 채워 쉬고 다시 출발했다.
해발고도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오르기 시작하는 빗재가 힘들었지 중간부터 오르기 시작한 벌재는 의외로 오를만 했다. 심지어 벌재 정상의 안내 표지판을 보고 「벌써 끝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이제 큰 업힐은 다 끝났으니 상주까지 다운힐과 평지 위주의 보너스 구간을 즐길 일만 남았다.
CP3에 1착으로 도착하셨던 분이 상주까지 해지기 전까지 가는 것이 목표라고 했었는데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200km를 넘게 탔는데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브레베 중엔 다들 배가 고파 허덕거리는데 나는 그 반대의 상황이라 너무 고통스러웠다. 평소엔 사족을 못쓰는 라면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토할 것 같았고, 비상식인 포도당 캔디, 파워젤도 물로 겨우겨우 넘겨 먹었다.
상주까지 논스톱으로 가려고 했으나 아까 제대로 자지 못해 금세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번엔 제대로 쉬려고 마음먹고 열심히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짜피 잠이 많기 때문에 400km를 달리는 중에 어디선가 자긴 자야했다. 그렇다면 추운 밤보다 차라리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는 것이 효율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그러던 중 강 옆의 팔각정자를 발견하고 신발 벗고 올라가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과 지인에게 카톡을 보내고 30분간 단잠을 잤다. 회복을 했으니 이제 무정차로 상주까지 가보자고 기합을 넣고 안장 위에 올랐다.
팔각정자에서 쉬기 전까진 내 앞을 달리던 분은 6명이었는데 상주로 가던 길에 못보던 랜도너를 여럿 지나치게 된다. 내가 잠을 자던 30분 사이에 많이들 지나간 모양이었다. 오히려 달리다가 랜도너의 뒷모습이 보이면 따라 붙는 재미도 있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존경해 마지않는 1200km 완주져지를 입으신 배테랑 랜도너도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을 한적한 시골길만 달리다 도심의 불빛을 보니 반가웠다. 상주 시내가 머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해가 다 지고나서 CP4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외국인 두 명을 또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This CP is good」이라 하길래 왜냐고 묻자 화장실이 있다고 한다. 강하게 긍정했다. 랜도너에게 화장실은 정말로 소중한 존재이다.
체내에 글리코겐이 다 빠져나가 몸은 열량을 원하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매일 아침에 먹는 시리얼을 떠올리고 죠리퐁을 집어 들었다. 죠리퐁을 한 줌 입에 털어넣고 우유를 마시는 식으로 먹었다. 우유는 다 비웠지만 죠리퐁은 결국 남기고 말았다. 비상식으로 빵을 하나 같이 샀는데 완주 할 때까지 식욕이 돌아오지 않아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
다음 CP까지의 거리는 거의 100km였다. 아까처럼 시골길이 계속되면 보급할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 감귤쥬스와 빵을 사 두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군데군데 편의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은 구간은 전체적으로 고도가 올라가는 형상이었는데 점점 추워지는 상황에선 오히려 근육의 쿨다운 효과를 볼 수 있어 페이스를 올리기 좋았다. 밤이라 교통량도 줄고 굉장히 고요해서 무념무상으로 앞만 보고 페달을 굴렸다. 다만 낮에 응급조치 했던 라이트가 너무 높은 곳까지 비춰 반대편에서 차가 올 때마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가로등도 없고 너무 어두워 경치 구경은커녕 헛것이라도 안보면 다행이었다. 이어폰을 한 쪽에 꼽고 졸음을 쫓으며 주행을 계속해 갔는데 중간에 너무 졸려서 팔각정에서 한 번, 버스 정류소 옆에서 한 번 쪽잠을 잤다. 굉장히 추웠으나 내게 있어 수면욕은 최우선 욕구인지라 전혀 개의치 않고 잤다. 아무데서나 굴러다니면서 잘 수 있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
버스 정류소 옆에서 잘 때 잠결에 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를 몇 번 들었는데 CP5에 도착하고나서 그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골까지 남은 거리가 고작 40km에 불과했으나 다들 지쳤는지 의자에 앉아 묵묵히 쉬고 있었다. 앉은 채 잠을 자는 분도 계셨다. 왠지 식욕이 돌아온 것 같아 편의점을 도시락을 구매했으나 아깝게 1/5도 먹지 못하고 버렸다. 그런데 그것 조금 먹은 것이 몸에 바짝 흡수 됐는지 갑자기 몸에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만난 6인 팩 그룹이 15분 먼저 출발했는데 길을 한 번 크게 해메고 갔음에도 대전 시내에서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인원이 셋으로 반토막이 나 있었다. 역시 극 후반이라 페이스가 제각각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분들이 CP5 편의점의 테이블에 그대로 방치하고 온 쓰레기를 정리하고 온 참이었기에 다시 만났어도 썩 반갑진 않았다. 아마 어르신들이라 편의점을 식당처럼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너무 힘드셨던 걸까? 먹고 나온 쓰레기는 테이블에 올려둘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잘 처리하고 가는 것이 맞다.
대전 시내에 들어와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못 됐다. 6시 10분에 광주로 가는 첫 차가 있어서 신호가 많은 시내 구간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5시 40분에는 완주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침이라 완주증을 발급해 주는 샵이 문을 닫은 상태여서 문자 메시지로 인증사진을 남기고 문 앞의 박스에 브레베 카드를 넣고 버스터미널로 서둘러 이동했다. (완주증은 나중에 등기로 보내주셨다.) 버스로 광주까지 2시간, 또 광주에서 목포까지 1시간 걸리는데 버스를 타고 내릴 때의 기억밖에 없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집에 도착 해 씻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이불 속에 다이빙할 때의 행복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번의 라이딩으로 400km 이상을 달린 적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코스 난도가 무박 부산보다 높았음에도 기록이 더 좋았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이므로 뿌듯했다. 이번 브레베를 통해 한 주 뒤에 있을 광주 600km 브레베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 라이트 마운트를 튼튼한 것으로 바꾸고, 장거리 라이딩에서의 식욕부진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웹 검색으로 증상을 알아봤었는데 위산과다, 역류성식도염이 의심된다. 다음에는 위장약을 준비해서 가봐야겠다. 600km는 더 힘들겠지만 내가 속한 팀의 정신적인 지주이신 프로바이크 사장님과 함께 하기에 든든하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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