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랜도너스/2019 코리아 랜도너스

2019 코리아1200 랜도너스 2편

by 벨로민턴 2020. 6. 28.

2019 코리아1200 랜도너스 1편 https://velominton.tistory.com/14


가벼운 접촉사고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라이딩을 계속해 나갔다. 22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마량 CP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 CP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짧은 왕복 구간이 있는데 여기서 빠져나오는 오동도님 팩과 다시 마주치게 됐다. 빠른 페이스로 달려오셨을 텐데 여전히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담겨있다. 주변에서 밥을 먹을까 싶었지만 배가 그렇게까지 고프지 않아 조금 더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CP에서는 가볍게 달콤한 보급식 위주로 챙겨 먹었다.

 

▲ 마량CP에서 보급
▲ 221.6km를 평속 30.5km로 달려왔다.

 

이후 한동안 칼로리폭탄님과의 멘투맨 라이딩이 이어졌다. 팩을 이뤄 다닐 땐 접촉낙차 위험 때문에 평소보다 집중해서 달리게 되는데, 둘이서만 오랫동안 달리니 루즈해져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에 잠 못 자고 출발한 후폭풍이 함께 찾아온 것이다. 페이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칼로리폭탄님께는 죄송했지만 결국 카페에 들러 짧게라도 잠을 청하고 가기로 했다. 갈증은 시큼상쾌한 자몽에이드가 시원하게 해결해 줬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칼로리폭탄님은 앉아서 쉬고만 계셨을 뿐 잠을 잔 것은 나 뿐이었다. 발목을 잡은 것 같아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데 칼로리폭탄님께서 조금 전에 연대보증 팀이 지나갔다고 하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짧지만 굵게 휴식을 취한 덕분에 머리는 한결 맑았고 파워 값을 보니 엔진이 달달달 꺼져가던 좀 전과 달리 충분히 힘도 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짧은 고가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 머뭇거리던 연대보증 팀을 만나 합류할 수 있었다. 광주 600을 함께 한 팀이라 너무 반가웠다!

다시 재미진 그룹 라이딩이 가능해 기뻤지만 역시 그랜드랜도너스, 뜻대로만 되진 않는다. 날이 급격이 안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출발 전부터 일기 예보를 통해 이미 각오는 했던 바이지만 꽤나 굵직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여기서 잠시 장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중 라이딩 시, 뒷바퀴에서 올라오는 오염물로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 로드레이서라는 머드가드를 달고 왔었는데 굉장히 유용했다. 다만 딱 내게 튀는 물 정도만 막아주는 듯 했다. 프레임을 가리는 머드가드라 설치가 어렵고 때론 간섭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다른 분들은 SKS의 머드가드를 장착해서 별 스트레스 없이 잘 다닌 것 같다. 따라서 머드가드가 필요하다면 SKS의 것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우중 라이딩의 큰 단점 중 하나는 앞 차가 만들어 내는 물보라로 드래프팅이 어렵다는 점인데 나는 팩 라이딩을 할 때 딱 붙어가는 것보단 멀리 떨어져 가는 것을 선호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는 일찌감치 모습을 감췄고 비는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설 일이 있을 때마다 추위에 몸부림을 쳤다. '다음 CP는 언제 도착하지'만 생각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 연대보증 팀이 알아봐 둔 '희망식당'이 금방이어서 저녁 식사 겸 몸도 녹일 수 있었다. 나는 편식이 심해 고기는 별로 당기지 않았고 대신 뜨뜻한 잔치국수를 시켜 속을 달랬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비를 피해 식당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 예보는 계속 됐기에 완주를 위해서는 우중 라이딩을 감내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1편에서 터널 앞 낙차 사고 얘기를 했었는데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그때 등장한 절연 테이프의 쓰임새에 관한 이야긴데 바로 1회용 우비를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었다. 펄럭거려 비에 노출 되기 쉬운 팔과 허리, 허벅지 부분을 테이프로 감싸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이는 겨드랑이 부분에 구멍을 내어 통풍 구멍을 만드는 어레인지를 감행했다. 배태랑 랜도너들의 지혜에 손벽을 안칠 수 없다. 나는 하체는 추위를 거의 타지 않아 비에 대한 대책은 허리 위로만 해서 왔었다. 경량 레인자켓을 입고 헬멧에 레인커버를 씌웠다. 발수 기능은 없었지만 레인 자켓이 가져다주는 보온 효과는 굉장했다. 다만 헬멧 커버는 내게 맞지 않은 듯했다. 머리에 땀은 차는데 쿨링을 시킬 구멍은 없고 가렵더라도 긁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절연 테이프로 고정
▲ 칼로리폭탄님을 챙겨주는 연대보증의 은성 형님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됐지만 조명이 들어온 자전거길을 달리는 것은 나름 운치 있었다. 이내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기온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슬슬 숙박처를 생각해야만 했다. 연대보증 팀은 중간에 들른 편의점에서 여기서 스톱할지 보은까지 이동할지 갈팡질팡 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Keep going이었다. 그랜드 랜도너스는 처음이라 코스를 잘 알지 못했는데 이 뒤로 피반령이라는 큰 업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를 맞으며 오르는 업힐은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업힐에선 힘을 더 써야하기에 몸에 열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비가 이를 식혀줬기 때문이다. 피반령을 오를 땐 바람이 정말 잠잠했는데 정상에 다다르자 반대쪽 산기슭에서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쳐 왔다. 속으로 잠시 신세 한탄을 하긴 했지만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랬나? 나만 힘든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 위로가 됐다. 언덕 정상은 그룹에서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피반령이 적힌 비석이 너무 캄캄해서 라이트 없이 알아보기 어려웠다. (여기서 인증사진 하나씩 찍거나 하던데 날이 아니었다.) 언덕 정상 쯤은 가로등 하나 둘 법 한데 말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룹이 어느 정도 다시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다운힐을 시작했다.

 

 

피반령 다운힐을 포함해 보은 시내까지가 그랜드 랜도너스 중에 가장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추위 때문이다. 너무 추운 나머지 저도모르게 등이 새우처럼 굽어졌고 저체온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함께 달리던 안진숙 누님의 남편분께서 보은에 숙소를 예약해 주셨다고 했는데 장소를 제대로 알지 못해 주변 일대를 헤매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칼로리폭탄님이 폭우가 쏟아지는 이 타이밍에 펑크를 맞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천사 같은 진숙 누님의 천사 같은 남편분의 도움으로 다 같이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랜드랜도너스의 첫날 밤은 나, 칼로리폭탄님, 그리고 디파처님과 보내게 됐다. 이곳에서 디파처님을 알게되어 셋이서 삼일 간 한 방을 쓰게 됐다. 디파처님은 랜도너스 경험이 많고 실력도 좋고 말주변도 좋은 팔방미인이셨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랜드 랜도너스가 2일차로 접어들었다. 숙박을 해야 하는 브레베(600km 이상)는 항상 일어날 때가 고비다. 수면욕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대로 DNF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단위 이동의 장점은 밀어주고 당겨주고 깨워주는 데 있다. 연대보증 팀에 매달려 가는(?) 입장에서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비몽사몽이었지만 새벽 공기를 들이켜며 페달에 힘을 내싣다보니 서서히 뇌와 몸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둘째 날 우릴 가장 처음 반겨준 건 말티재였다. 한국에서 이 정도로 아름답게 굽이굽이 이어지는 업힐 도로가 몇 군데나 있을까. 말티재를 올라가는 입구에 마이크가 운영하는 비밀 CP가 있었고 백두대간 팀원들은 그와 찐한 인사를 나눴는데 그런 유대감이 굉장히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 나, 디파처님, 칼로리폭탄님, 스타이렌님.
▲ 비밀 CP
▲ 말티재
▲ 든든한 은성 형님
▲ 시라소니 님, 조영남 님(나보다 압도적으로 종아리가 튼실하신 분은 오랜만에 뵙는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상주 CP에 도착했다. 일단 자전거는 CP에 대놓고 옆에 있는 김밥나라에 들어가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단백질 보충은 돈가스로, 탄수화물 보충은 라뽂이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드롭 백 서비스를 신청해놨기 때문에 드롭 백을 보관하고 있는 모텔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꾸질꾸질한 빕과 저지를 갈아입었다.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는 행복감은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봤다. 

 

▲ 드롭 백 서비스. 이 중 한 보따리가 내 물건이다.
▲ 새 옷으로 환복

 

 

3편에서 계속.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