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서울300 랜도너스
브레베 종류 : 서울 300KM 브레베 (획득고도 3,528m)
출발시각 : 2019.04.20. / AM04:30
완주시간 : 15h. 34min.
자전거 : Addict10 (2015)
1. 잠이 많다.
2. 연비가 안좋다.
3. 힘들면 식욕이 사라진다.
이는 내 몸이 장거리 라이딩과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세 가지 주요 항목이다. 이와 같은 습성에 300km가 넘는 라이딩 경험이 많지 않은 내게 있어, 서울 300은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힘겹게 완주를 했고 출발 전 컨디션 관리의 중요성을 확실히 느끼게 된 날이기도 했다. 그랜드 랜도너가 되기위해 필요한 남은 400km, 600km, 1200km 브레베는 어떻게 해쳐 나가야할 지 벌써부터 걱정됐다.
서울300의 출발지점은 반포대교 근처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인접해 있다. 목포고속버스터미널 또한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출발지까지의 이동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2시에 서울행 버스에 탑승해 차박을 하고, 주어진 세 출발 시간 중 가장 이른 4시 30분에 라이딩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그럴 듯 했지만 한 가지 착오가 있었다. 고속버스 안이 그렇게도 더울 줄은 상상치도 못한 점이었다. 찜통 같은 버스 안에서 몸부림치며 결국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서울에 도착하게 됐다. 서울300 후반부에 경기도권 최고의 업힐 코스로 꼽히는 화악산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러한 컨디션으로 잘 넘어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출발지에 도착해 면책포기각서를 작성하고 검차를 받은 뒤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주의사항과 함께, 랜도너스는 여행이니 즐기고 오라는 응원의 메시지을 듣고 일제히 파이팅 넘치게 출발했다. 그러고보니 마이크를 잡으신 분의 말이 길어져 출발 시각인 4시 30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딴지를 걸지 않는 인자한 랜도너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전체 구간에서 페이스를 CP1 전과 후로 양분하여 설계했다. CP1까지는 가장 빠른 팩에 붙어 몸을 올리고, 그 이후로는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갈 생각이었다. 출발한 지 5분쯤 됐을까? 팩을 이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 라이더가 쫓아가듯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지금 속한 그룹이 최선두가 아님을 깨닳았다. 아마도 시야확보가 되지 않은 반포대교 약 오르막과 다리 끝의 기역자 코너링에서 알게 모르게 그룹이 쪼개진 모양이었다. 현재 속한 그룹의 페이스가 부담없고 좋아 앞쪽의 팩으로 이동할지 말지 고민을 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최선두 그룹과 함께 가기 위해 독주를 강행했다. FTP에 근접하는 300w 이상의 힘을 꾸준히 내어 선두그룹에 붙을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벌어져 있어 다리에 크게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출발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최선두 그룹에서는 TREK사의 붉은색 로드바이크를 타던 분이 오랫동안 말뚝 선두를 서다 RCC 질렛을 입으신 분에게 배턴을 넘겼는데 그때부터 무자비한 페이스로 끌려갔던 기억이 난다. 그분의 정체가 무엇일까.
빠른 페이스 속에서도 체온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이 날 최저기온이 9도라고 일기예보에서 봤었는데 가민이 보여주는 실 온도를 보니, 동이 틀 때까지 줄곧 4도 이하를 유지했다. 심지어 수목원을 지나갈 땐 숲과 나무가 뿜는 음기로 0.7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팔과 손가락이 꽁꽁 얼어 뒷 주머니에서 브레베 카드를 꺼내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새벽, 야간 라이딩이 포함되어 있다면 최소한의 방한 용품은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경험한 구리 자전거길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이름 값을 하는건지.. 노면이 안좋아 펑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 앞에서 「펑」하며 튜브가 터져 정차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동트기 전이라 여전히 춥고 어두웠는데 같이 가던 팩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아 조금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친 노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충격에 고통받고 추위에 벌벌 떠는 시간이 지속 됐지만 초행길이라 그런지 여행 기분이 나서 한편으로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덧 CP1에 도착하게 됐다.
브레베 카드에 도장을 찍으려고 CP1 점원에게 물어보니 도장이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1차 당황했다. 다른 랜도너 분께 여쭤보니 영수증으로 추후 인증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바나나 우유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는데 이번에는 카드결제가 안된다고 한다. 재밌는 건 왜 안되는지 점원도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허허허. 얼떨결에 비상금으로 가져 온 1만원을 주섬주섬 꺼내 계산하고 잔돈을 받았는데 바로 후회가 됐다.
「동전 왜이렇게 무거워..」
자덕이 되고나서 별것도 아닌 무게에 무척 인색해 진 것 같다. 재밌는 건 바나나 우유를 사고 등을 돌려 빨대를 꼽자마자 점원이 도장을 발견했다며 소리를 낸 점이었다.
CP1까진 TEMPO 강도로 왔으니, 이제부터는 존2 정도의 저강도 페이스로 꾸준히 달려 나가야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남들 페이스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홀로 CP를 떠나 달리기 시작했다. 간혹 소수의 그룹과 만나기도 했지만 함께 하진 않았다. 내 페이스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됐는지 CP2 이후로 내 뒤에 붙어 오시는 분도 제법 되어 처음으로 말뚝 선두를 체험하기도 했다. 내가 팩에 속해 이동할 땐 매번 뭍혀 가기만 할 뿐 선뜻 교대를 받아드린 적이 없었는데 랜사모 카페의 '꼬진잔차'님이 「힘들어 보이네요. 제가 앞으로 갈게요.」 라고 나서서 교대를 받아주셔서 조금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그룹 라이딩인가! 요즘 주변을 조금만 살펴봐도 무개념 라이더가 쉽게 눈에 들어오는데, 랜도너스 중에는 특히 인성 좋으신 분들을 많이 뵙게 되어 치유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침에는 그렇게 춥더니 해가 뜨고나니 이제는 제법 덥다. 기본적으로 구름이 많이 낀 날씨였지만 간혹 해가 머리를 내밀 때면 쨍한 하늘과 풍경을 잠시나마 즐길 수 있었다. 유명한 랜도너인 제이슨이 사전 답사를 갔을 때 찍었다는 백골마크 앞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나지막한 업힐을 하나 넘어 CP3에 도착했다.
랜도너스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열량 보충이다. 연료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지만 페이스 저하 없이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샌가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이번에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장거리 라이딩 때마다 이 같은 식욕 부진을 겪었는데 심한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경기도권에서 업힐 끝판왕으로 불리는 화악산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음식을 어거지로라도 욱여넣을 필요가 있었다. 마침 화악산 직전에 있는 CP3가 편의점으로 지정돼 있어서 그곳에서 산 하나를 넘을만한 칼로리를 어찌어찌 채워넣긴 했으나, 이번에는 소화불량에 걸리고 말았다. 딸국질이 멈추지 않아 호흡이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진행에 어려움을 느껴 쉴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화악산 초입에서 좋은 그늘막 쉼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자로 누워 10분 정도 쪽잠을 잤다. 안그래도 잠을 못자고 출발해서 정신이 몽롱했는데 허리를 쭉 펴고 단잠을 자고나니 몸이 정말 개운했다.
복장을 갖추고 다시 화악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10%를 넘는 어이없는 경사도가 계속 되니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서울300을 준비하면서 화악산 하나를 위해 11-28t 카세트를 11-32t로 바꿔갈까 십 수 번을 고민했는데 결국 바꾸자고 결심한 과거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32t 교체는 옳은 선택이었다. 32t 풀 이너에서도 부하가 걸리는 게 제법 느껴졌고, 34t 이상의 세팅에 아주 천천히 올라야만 다리에 쌓이는 젖산을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2t 바로 밑장이 기존 세팅에서 가장 가벼운 단수인 28t였는데 이따금씩 28t로 바꿔가며 「그래 이걸로 왔음 아주 죽었을거야」 같은 상황극을 연출하며 행복회로를 돌려 멘탈을 가다듬었다. 또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악화악」 소리를 내며 영차영차 효과를 기대하고 올라가보기도 했다. 이건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한 쪽에 무선 이어폰 꼽고 겨우내 로라를 탔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채 천천히 올라갔다.
화악산은 로드 입문하고 2015년도에 친구와 단 한 번 와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지금과 반대방향으로 올라와서 화악산의 마스코트, 곰돌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었다. 다운힐에 집중한다고 앞만 보고 내려갔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천천히 올라왔기 때문에 놓치고 싶어도 놓칠 수가 없었다. 접때 못 본 곰돌이를 만나게 되어 반갑기도 했지만 사실 이보다도 바로 옆에 있던 약수터의 존재가 더욱 반가웠다! 차에 빈 물통을 가득 싣고 와 물을 담고 있는 부부가 있었는데 내가 뒤에 쭈뼛쭈뼛 서있자 물통에 물을 먼저 채우게 해주셨다. 나는 평소 물을 정말 안마시는데 업힐 내내 찐을 빼서인지 이곳에서 마신 물맛은 역대급에 속했던 것 같다.
냉동고 속을 방불캐 하던 화악터널을 오들오들 떨며 지나, 길고 긴 다운힐에 접어들었다. 반대편에서 고통스럽게 올라오는 라이더들을 지나칠 때마다 괜한 행복감에 젖는다. 나는 이미 그 고통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지. 화악산을 넘고 나니 마음의 큰 짐을 덜어낸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서서히 몰려오더니 급속도로 졸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도로에서 순간 의식이 끊겨 휘청했는데, 깜짝 놀라 심박이 확 치솟았다. 이대로는 좀 위험할 것 같아 편의점에서 들러 잠깐 잠을 청하기로 했다. 테이블에 양팔을 괴고 엎드렸는데 영 불편해서 오래 자진 못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화악산 이후, 통역 아르바이트로 한 번 와 본적이 있는 아기자기한 쁘띠프랑스 타운도 지나고, 강과 나무, 자연으로 가득한 힐링코스를 만끽하며 종착점을 향해 달려 갔다. 마지막 CP를 지나고 얼마 가지 않아 연료가 고갈되어 한 번 고비가 찾아왔었는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 먹은 줄 알았던 파워젤이 하나 남아있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딱 파워젤을 입에 물었을 때 내 옆을 지나가는 엄청난 페이스의 5인조 그룹이 있었는데 한 번 붙어 가보기로 했다. 체내에 글리코겐이 고갈 돼 안떨어지고 끝까지 붙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붙어보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다행이 최후미에 대롱대롱 매달려 갈 체력은 남아 있는 것 같다. 배테랑 랜도너들의 후반 저력은 어마어마했다. 좋은 자극을 받았다. 멋진 팩을 만난 덕택에 예보에 없던 비가 거세지기 전에 완주할 수 있었다. 저녁 8시쯤 완주해서 큰 기다림 없이 9시 직행 버스를 타고 다시 목포로 내려올 수 있었다.
이번 랜도너스에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도 굉장한 의지와 체력을 지닌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겸허해졌다. 그리고 페이스 연구와 컨디션 관리 등에 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함을 깨닳았다. 4월 1월, 시즌 온에 앞서 측정한 맵테스트에서 FTP 319(4.67w/kg)의 결과를 받고 300km 쯤 어떻게 되겠지 하는 근본없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깊게 반성 중이다. 또 브레베 중 보급 후 남는 물이나 식량을 권하는 모습에 힘듦을 함께 공유하고 독려하는 참된 랜도너 분들의 심성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오늘 보고 배운 미덕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올곧은 랜도너가 되고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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