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속도는 더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올해는 아이가 태어나 육아와 일, 공부를 병행하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 것 같다. 그동안 얼굴도 많이 늙어버린 것 같고.
어느덧 2025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올 하반기를 돌아보면 여러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염원하던 ACP10000을 달성한 것이다. 이번 글은 그 이야기부터 풀어보려 한다.
1. ACP10000 달성
이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ACP10000의 달성 조건은 가끔씩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나처럼 한 번만 확인하고 지나가면 큰일 난다. 주기적으로 공식 홈페이지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내 경우 이미 Super Randonnées 1회 완주가 ACP10000의 조건에 포함된다고 믿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건이 바뀌어 8000m 이상 고도 상승을 포함한 600km BRM을 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당황했다. 덕분에 갑자기 부산600 Heavy 대회를 참가해야 했고, 비를 맞으며 고생했다. 싱글이라면 마냥 즐거운 기억이었겠지만, 이제는 집에서 고생하는 와이프가 있어 1박 이상의 대회는 최근 들어 부담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생을 거쳐 ACP10000을 달성할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보낸 메달과 인증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받자마자 느낀 점은, 한국 란도너스에서 제작하는 메달이 훨씬 예쁘고 퀄리티가 좋다는 것이었다. 금색이 너무 촌스러운 노란색에 가까워 보였고, 인증서의 종이도 환경을 고려한 재질인지 힘이 없고 쉽게 구겨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환경을 생각하는 유럽!) 만약 메달이나 인증서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보관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혹시 ACP10000의 달성 조건이 궁금한 분들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최신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2024년 11월 기준으로, 달성 조건은 아래와 같다.
■ 2회의 ACP 브레베 시리즈 (200, 300, 400, 600, 1000 km) 완주
■ 1회의 파리-브레스트-파리(PBP) 완주
■ 1회의 1200 km+ 이벤트 (Les Randonneurs Mondiaux 인증) 완주
■ 1회의 Flèche Vélocio 또는 국내 플레시 완주
■ 1회의 Super Randonnée (2022년 10월 31일까지 인증된 것) 또는 Brevet Randonneur Mondial 600 km (최소 8000 m 고도 상승)
■ 기타 ACP 이벤트로 총 10,000 km 이상을 완료
2. 일본어 능력시험 JLPT N2 응시
관련 학과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 취업해 일본어를 사용하며 밥벌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JLPT N1급을 만점으로 갱신한 뒤, 언어 자격증 시험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현 직장에서, 비록 미미한 점수이긴 하지만 일본어로 언어 가점을 받으면 승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JLPT N2급부터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한 번에 최고 등급인 JLPT N1을 응시해도 괜찮았지만, N1을 취득하면 일본어로 받을 수 있는 가점이 한 번으로 끝난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래서 현 계급에서는 N2를 취득해 0.3점을 먼저 챙기고, 이후 계급에서는 N1을 취득해 0.5점을 추가로 받는 가성비 높은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일본어 학습은 학부 시절 이후로 거의 10년 가까이 손을 놓고 있었지만, 당시 빡빡하게 공부했던 기억 덕분에 JLPT N2 정도는 무리 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랜만에 시험장에 가보니,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많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의외로 어린 학생부터 다양한 연령대의 성인들도 드문드문 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각자 어떤 이유로 이 시험을 보러 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시험을 보러 온 학생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유학을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에 나 역시 설렘 가득 안고 일본 교환학생 서류를 제출했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시험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문제 유형조차 몰랐지만, 다행히 각 파트가 시작되기 전에 예제 문제가 제공되어 문제 형식을 미리 파악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험 특유의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10년 동안 공부를 멀리했던 것치고는 의외로 괜찮았다. 아마도 일본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거나, 일본 사이트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다니던 일상이 일본어 감각을 유지시켜 준 덕분인 것 같다.
듣기 파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나 단어가 단 하나도 없었고, 모든 내용이 또렷하게 들렸다. 시험의 특징도 JPT처럼 한국인이 실수하기 쉬운 함정을 파놓지 않았고, 문장 어순도 한국어와 같아서 마지막 서술어까지 주의 깊게 들으면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같은 콘텐츠를 꾸준히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유지된다니, 덕질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문자와 어휘 파트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어려운 단어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생전 처음 치러보는 N2 시험의 난이도를 가늠하며 막힘없이 답을 찍고 넘어갔다. 기억 속의 N1과 비교했을 때, N2와의 난이도 차이는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내가 예상했던 N2의 수준은 N1.5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독해 파트는 읽어야 하는 양이 많고 문제 수도 많아, "혹시 나 성인 ADHD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금세 지쳐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어휘가 없었기에, "이러다 만점 나오는 거 아닌가?"라는 내심 설레발까지 쳐보게 됐다.
시험이 끝난 후 한동안 결과는 잊고 지냈다. 그러다 점수 확인 기간이 되어 복권을 긁는 기분으로 스크롤을 천천히 내려봤다. 결과는 언어지식 60점, 독해 53점, 청해 60점으로, 180점 만점에서 173점을 받았다. 참고로 합격 기준은 100점이다. 독해에서 7점이 깎인 걸 보고 어디에서 실수했는지 궁금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나치게 빠르게 문제를 풀어나가다 보니 실수가 생겼던 것 같다. 시험 시간이 약 20분 정도 남았던 만큼, 조금 더 신중하게 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이제야 들었다. 그래도 독해에서 7점이나 깎였는데도 백분율이 99.3%였다는 점은 놀라웠다. 아마도 N2 정도는 무리 없이 풀어낼 수 있는 실력이라면 대부분 N1을 선택했을 테니, 이 결과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5년 이내에는 N1 시험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때는 시간을 들여 제대로 준비한 뒤, 두 번째로 퍼펙트 스코어를 노려보고 싶다. 물론, 합격 여부 외에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자기 만족감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또 다른 성취감을 맛보고 싶다.
하루 잠깐 일본어와 다시 친해질 수 있었던 이번 시험은 생각보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쩌면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꺼려하던 한자마저 깜지를 써가며 즐겁게 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의 직장을 선택한 것이 현실적인 결정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약간, 아주 약간의 고민이 스쳐 지나가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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