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두대간 챌린지의 시작
총 4개의 백두대간 퍼머넌트 시리즈(총 거리 1,760km / 획득 고도 42,000m) 중 마지막 순번인 백두 4번(PT-25)을 시작으로 백두 챌린지에 도전하게 됐다. 백두 챌린지를 달성하는 데 완주 순서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PT-25번을 첫 코스로 삼은 이유는 단순히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의 도전 끝에 완주를 했고, 그간의 실패담을 포함한 과정 일부를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참고로 획득 고도를 고려치 않고 거리 대비로 제한 시간이 정해지는 브레베 코스의 특성상, 1100 고지가 넘는 지리산에서 업힐 피니시를 맞이하게 되는 백두 4번은 시간관리가 빠듯하기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얀에게 출발 메시지를 보내면 "Have success on the hadest permanent"와 같이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 각오를 다지게 하는 답변을 받아볼 수 있다.
2. 참가 동기
자전거를 해외여행, 국토종주와 같은 투어로 접했기 때문에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여행기분을 주는 랜도너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런 기분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는다는 고난도의 도전 과제가 있다는 것을 2년 전 그랜드(1200k)를 뛰며 알게 됐다. 그랜드를 완주하고 공허함에 빠져있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 백두 챌린지라는 식의 영업 멘트를 접한 것인데, 그 해에는 PBP도 있고 해서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었다. PBP 완주 후 티켓 값이 아까워 덴마크의 쾨펜하겐까지 찍고 돌아오는 2개월 간의 여행을 끝마치고 귀국하니 웬걸? 코로나 사태가 터져 정규 브레베가 차례차례 취소되며 멘탈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ACP R5000 달성을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정규 브레베가 열리지 않으니 닿을 듯 닿지 않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길 잃은 양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했다.
언젠가 좋아지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며 R12와 어드밴처 챌린지를 통해 공허함을 달래던 중, 급작스럽게 백두 뽕이 찾아왔다. 백두 퍼머넌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각 퍼머넌트 당 최소 3일씩은 필요한데(출발지로의 이동 시간 포함), 현재 도서지역에서 2당 4비 체제로 교대근무를 하고 있어 시간을 내기 굉장히 수월했던 것이 한몫했다. 연가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개꿀 환경인 것이다. 도전을 하려면 올해가 적기였다. 바쁜 곳으로 인사가 날 수도 있으니 그전에 호다닥 끝내보자며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결과는 DNF. 오 마이 갓. 자세한 내용은 아래서 기술하겠다.
3. 첫 번째 DNF
처음 도전한 날은 6월 8일이었다. 215.95km를 이동하고 얀에게 눈물의 톡을 보냈으니 대략 절반 정도 이동하고 DNF를 한 셈이다. 백두 4번은 중반 이후로 오두재, 오도재, 성삼재와 같은 강력한 업힐 구간이 자리 잡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사실 상 첫 도전은 백두 향만 맡고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출발 당시의 컨디션은 10점 만점에 8~9점 정도로 자가 진단을 내릴 만큼 비교적 훌륭했다. 잠을 조금 설친 수준이었다. 타깃 NP를 200w로 설정하고 진행했으며 DNF 지점까지 단 1w의 오차만을 둔 NP 199w / 평속 24.4km로 이동했다. 하루 전에 충분히 카보 로딩을 해두었기 때문에 적은 보급으로도 200km가량 타깃 파워를 유지하며 이동할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높은 낮 기온으로 더위를 강하게 먹은 것이 실패의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무주 적상산을 넘고 내려온 뒤로 음식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CP5 도마령 구간부터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고 이런 상황에서 결과는 안 보더라도 뻔했다. No input, No output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더라도 몸에 비축된 힘을 다 쓰면 고통에 허우적 댈 것이 틀림없다. 결국 덕산재(CP7) 다운힐 끝에 있는 대덕면 마을까지 이동 후 눈물의 DNF를 하게 된다. 이대로 진행하면 곧 마주하게 될 멘탈 탈곡 구간 오두재(3.7km, 11.6%)를 넘어, 밤을 지새우고 재시간 안에 완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4년도에 로드 입문 후 무주 그란폰도를 나갔었는데 그때 오두재에서 개고생 했던 기억이 강하게 뇌리에 박혀있어 부담감이 가중됐던 것 같다.
DNF 후 내 몸 상태에 대해 많은 검색을 해봤다. 자극적인 음식, 커피, 먹고 바로 눕기 등 위에 안좋은 행위를 모조리 좋아해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매번 역류성 식도염 판정을 받았었는데, 추가로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습성, 전방으로 많이 수그리게 되는 로드의 자세 등, 복합적인 이유로 속 쓰림이 심해지고 그 결과 식욕 상실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특히 잦은 딸꾹질로 호흡에 방해를 받아 업힐에서 굉장히 불편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는 두 번째 도전에서도, 세 번째 도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딸꾹질이 발생하는 타이밍과 이유는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겠다.
이래나 저래나 첫 도전의 결과는 익숙지 않은 DNF였기에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먼 김천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준 어머니께 죄송스럽기도 했고, 이렇게 빡센 코스를 타는 줄 몰랐다며 다시는 가지 말라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지만 랜도너스를 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 정도는 한다며 얼버무렸고, 실패라는 결과는 마음 한 켠에 응어리져 남아 있었다.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7~8월은 결혼 준비와 승진 시험 준비로 굉장히 바빠 정신이 없었으나 9월 초에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리벤지라는 세 글자가.
4. 두 번째 DNF
두 번째 도전은 10월 13일에 이뤄졌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면 10월도 백두를 다녀오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덤으로 단풍구경도 할 수 있다. 다녀온 로그를 보니 한 낮 기온이 23도, 해가 지고도 14도 정도여서 적당히 서늘하고 일교차도 크지 않았다. 달리기엔 6월보다 훨씬 쾌적했으나 이번에는 결혼 준비로 초기화된 몸뚱이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위장 문제,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풍령(빼재) CP 도착을 앞두고 마주하게 된 상황이 리타이어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초기화가 됐으므로 첫 도전 때 보다 타깃 NP를 30w가량 낮게 잡고 출발했고, 대신 휴식시간을 줄이고 꾸준히 가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웠다. 확실히 파워를 낮게 잡으니 몸은 덜 힘들었으나 시간 압박이 그만큼 늘었고, 200km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다시 위장 문제와 식욕 부진이 찾아와 완주에 대한 불안감을 더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길 다시 올 순 없지 싶어 컨디션을 살피며 천천히 진행했다. 지난번엔 경험하지 못했던 오두재를 힘겹게 넘고 그로부터 고작 7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신풍령(빼재) 업힐을 올라가는데, 아무렇지도 않던 날씨가 급변했다. 밤이고 산속이라 그런가 보다. 마치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을 방불캐했는데 으슥한 분위기에 나뭇가지도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고, 라이트가 비추는 영역에는 안개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그 중간 형태로 가득 차 있음이 보였다. 동시에 옷도 빠르게 젖어갔다. 신풍령 업힐 초입에 통행금지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그냥 무시하고 넘어오긴 했는데, 설마 난데없이 낭떠러지가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놀라 브레이크를 훽 잡았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엄마를 찾았다. 아찔했다. 만약 업힐이 아니고 다운힐이었으면 도로 밑으로 추락했을 수도 있다. 자전거 앞바퀴를 들어 라이트로 이리저리 주변을 비춰보았지만 시야가 너무 안 좋아 도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처음엔 우측 차선이 모조리 유실돼 있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 조금 더 올라가 보았는데 이젠 아예 도로 전체가 끊겨 있다.
가민을 보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CP인 것 같은데 참담한 심정이었다. 우선 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다행히도 비교적 빨리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신풍령 CP를 스킵하고 터널을 지나가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하란대로 했어야 했다. 그런데 으슥한 길을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았고 CP가 너무 코앞이라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까워 갈팡질팡하던 찰나에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별일 없냐고. 상황을 설명하니 엄마는 기가 막히게 도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느 길을 달리는지 궁금해서 이곳에 한 번 와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와보니 도로가 차단돼 있어 궁금증에 차를 세우고 산책 삼아 한 번 내려가 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끊긴 도로 옆으로 좁지만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끔 산책로 같은 것이 있다고 알려줬다. 어 그런 거 못 봤는데 하고 다시 주의 깊게 라이트를 비춰보니 혹시 저건가 싶은 길이 있었다. 길이 끊겨 사람이 무리하게 지나다니다가 생긴 것 같은 열악한 샛길이었다. 지면은 비 같은 안개로 진흙화 되어 발은 푹푹 빠지고 어깨에 짊어진 자전거, 특히 돌출된 TT바가 나뭇가지에 자꾸 걸리면서 마음 아프게 했다. 나는 그냥 자전거를 타러 온 건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회로 자체의 길이는 길지 않았다. 다시 반가운 아스팔트로 나와 신풍령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어라 클릿이 안 끼워진다. 스피드플레이 클릿을 사용하고 있는데 페달을 끼우는 그 공간이 진흙으로 가득 차 버린 것이었다. 길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긁어 파내 보려 했으나 나뭇가지가 힘이 없어서 자꾸 부러지고, 그 와중에 안개로 몸이 몽땅 젖어버려 체온도 많이 내려가 더 이상의 야간 라이딩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의상실이다. 이번에도 실팬가..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픽업을 부탁했다.
후일담이지만 엄마에게 좋은 곳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지, 신풍령은 왜 가고 그 밑에는 뭣 때문에 갔다 왔냐고 물어보니까 만보를 채워야 해서 운동 겸 갔다 왔다고 한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1일 1운동(주로 하이킹)을 꼭 하시는데 운동 중독인 걸 보니 그 엄마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웃겼다. 그리고 그 지경이 된 도로를 보고 진짜 진짜 다신 백두 같은 데는 가지 말라며 신신당부하셨다. 후~
4. 마지막 도전
와이프나 부모님께 걱정 끼치기도 미안하고 실패를 두 번이나 하다 보니 백두는 나와 연이 아닌가 싶어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이게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생각이 난다. 알 수 없는 백두의 마성이다. 괜스레 비번인 날의 날씨를 기웃기웃 확인하곤 했고, 뉴스에서 다음 주부터 급격하게 추워진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럼 이번 주가 마지막 기회네?라는 생각만 철없이 맴돌았다. 결국 한 달 날씨를 펼쳐놓고 고민을 해봤다. 좋겠다 싶은 날짜를 고르고 와이프에게 실패하든 성공하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얘기했더니 흔쾌히 허락해 줬다. 오히려 오빠가 음식을 잘 못 먹어 완주를 못하는 것 같으니 위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준다며 식단 관리를 해주었고, 위에 좋다는 양배추 즙을 주문해 주기도 했다.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떠나기로 계획했던 11월이 성큼 다가왔고 내 마음을 약하게 하는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고자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홀로 김천으로 향했다. 지난번처럼 누군가가 픽업을 해주면 여러모로 편한 점이 많지만 언제든지 포기하고 쉽게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선택지는 일찌감치 버려버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멘탈 싸움이다.
목포-김천 구간은 직행버스가 없어 김천과 가까운 구미행 버스에 올랐고, 구미버스터미널에서 김천까지는 자전거로 이동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해 카보 로딩을 두둑이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5시에 일어나 미리 사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김천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11월 2일 06:05에 세 번째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무리하면 위가 빨리 맛이 가기 때문에 힘이 남더라도 페이스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세 번째 도전이다 보니 네비에 100% 의존할 필요가 없어 주변 경관도 봐가며 여유 있게 진행 가능하다는 슬픈 장점이 존재했다. 비교적 상승고도가 낮은 첫 번째 CP 쾌방령(06:42 인증)과 두 번째 CP 도덕재(08:41)는 여느 때와 같이 웜업 겸 컨디션을 체크하며 무리 없이 지나갔다.
10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단풍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적상산을 올라갈 땐 확실히 해발고도가 높은 탓인지 여전히 불그레한 단풍과 노란 은행이 보는 눈을 즐겁게 했다. 적상터널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인부들이 교통 통제를 잘해주고 있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보수공사 기간은 2022.2.12. 까지라고 한다. 적상산은 10킬로미터나 되는 긴 업힐이지만 경사가 세지 않아 큰 대미지 없이 넘을 수 있는데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로 올라가는 짧은 구간은 댄싱을 꾸역꾸역 섞어 넣어야 할 정도로 가팔랐다.
낮 기온이 15도 정도라 나름 쾌적한 날씨 속에 업힐을 마치고 CP3 안국사(11:50)에서 미리 챙겨 온 김밥 한 줄을 꺼내먹었다. 해발고도가 970m를 넘는 곳이어서 기온이 8도까지 떨어졌는데 김밥 먹는다고 잠깐 쉰 사이에 땀이 식어 내려갈 땐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굽이굽이 헤어핀을 돌며 내려가는 적상산의 긴~ 다운힐은 본디 정말 익사이팅한 구간인데 이번에는 낙엽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대폭 낮춰 내려갔다. 이후 치마재(590m)를 넘고 이어지는 약 내리막 도로에서 속도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CP4 라제통문(11:50) 도착이다.
나고야대학 유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무주 태권도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 두 번째 도전 때는 라제통문 바로 앞에 있는 '거시기 짬뽕'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났다. 고민이 좀 됐지만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기로 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설천면 CU로 이동해 롤빵과 사리곰탕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밥을 먹자 신호가 와서 근처에 있는 반딧불 랜드 화장실(무려 비데가 있다)에서 볼일을 보고 도마령(800m) CP5(13:23)을 지나 CP6(14:49) 우두령(720m)을 무난히 클리어, 싱싱한 다리를 최대한 길게 유지하기 위해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첫 도전 때 도마령에서 더위를 먹고 맛이 갔는데 Fresh 한 현 몸상태를 보니 금번 도전은 아주 느낌이 좋았다.
우두령은 여느 백두대간 비석과 달리, 고개 이름에 걸맞게 소 모양의 비석이 있어 차별성을 띄고 있다. 때문에 괜찮은 포토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얼마나 버리고 가는지 누군가가 보다 못해 가드레일에 경고문을 큼지막하게 적어 둔 것이었다. 락카로 말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질타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가드레일에 끄적끄적하는 것도 미관을 상당히 해치는 부분이어서 다른 방법으로 의견을 피력했으면 좋지 않았나 싶다.
마산령(650m), 부항령(630m) 두 고개를 넘어 덕산재(644m) CP7(16:43)에 도착하니 5시가 다 돼갔다. 해가 많이 짧아져 금방 어두워질 것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해가 지면 특히 내리막에서 시야가 제한돼 페이스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밝을 때 덕산재에 다다를 수 있어 운이 좋았다. 덕산재 다운힐은 직선으로 쭉 뻗어 있어 아마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최고속도를 찍을 확률이 큰데 해가 진 뒤에 왔더라면 이 짜릿한 스피드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산재에서 내려와 두 번째 도전 때 DNF를 했던 대덕면 마을로 진입해 하나로마트 편의점에서 캔커피, 바나나우유, 돼지바, 봉따로 간단하게 보급을 하고 다음 CP인 삼봉산 슈퍼로 향했다. 삼봉산 슈퍼 맞은편에 식당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대덕면에서 군암재(610m)로 올라가는 길 초입은 도로 공사 중이라 차량 스트레스가 좀 있는 편이었다. CP8 봉산슈퍼(18:27)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어두컴컴했고 기온은 7도까지 떨어졌다. 식당에 들어가서 여쭤보니 식사는 백반만 된다고 한다. 맛은 괜찮았다. 밥을 먹는 사이에 보조배터리를 충전해놨었는데 식당에 놓고 오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안타깝게도 이를 오두재를 넘고 난 뒤에 알아차렸기에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이후 가민과 휴대폰 배터리 관리한다고 굉장히 애를 먹었다.
명실공히 이번 코스의 삼대장 중 하나인 오두재(920m)는 터널 옆 고각 구간에 들어설 때가 정말 힘들었지만 여러 업힐들을 넘으며 고통에 익숙해진 탓이지 생각보다 참고 견딜만했다. CP9(20:11) 오두재를 넘고, 이어서 두 번째 도전에서 DNF 한 신풍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난번처럼 질척한 날은 아니어서 들바로 흙길을 걷더라도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도로가 끊긴 부분까지 오른 뒤에 기억을 더듬어 지난번에 이용했던 산책로로 바로 들어갔는데 나무가 줄줄이 쓰러져 있어 도저히 건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빠꾸. 얀에게 연락을 할까 싶었는데 어이없게도 낭떠러지였던 길이 흙으로 매워져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시야가 좁은 상태에서 너무 샛길만 생각하고 올라온 탓이었을까. 이렇게 빨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흙으로 메운 길은 다행히도 끝까지 연결돼 있었다. 이 정도 복원 속도라면 아스팔트가 깔리기까지 그리 머지않은 것 같다.
CP10(20:49) 신풍령(빼재)을 지나 칡목재(710m)를 넘어 남재(910m), 육십령(700m)을 무념무상으로 넘었다. 칡목재를 넘고나서부터는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팔각정에서 20분 정도 자고 가려 누웠으나 너무 추워 뜬 눈으로 시간만 허비하기도 했다. 수면욕은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누워서 허리를 펴고 나니 몸은 한 결 가벼웠다.
CP11(01:06) 무령고개(915m)를 넘고 오래간만에 긴 다운힐을 만났는데 이런 구간에서 헬멧 라이트가 빛을 발했다. 야간 다운힐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전거에 고정된 전조등이 커버하지 못하는 헤어핀 구간에 있는데, 헬멧 라이트로 진행 방향을 비추니 도로 파악이 쉬워 브레이킹을 최소한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동시에 고라니 같은 위험요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행거리가 300km을 넘으니 슬슬 위장이 맛이 가는 게 느껴졌다. 밥을 먹은 지 한참이 됐는데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식욕이 사라질 것을 대비해 파워젤을 12개나 챙겨 왔는데 짐만 될 것 같았던 이게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다. 개인적으로 파워젤 값이 쓸데없이 비싼 것 같아 그 돈이면 맛있는 라면이나 빵 하나 더 사 먹고 말지 이런 주의였는데 앞으로 굉장히 힘든 도전에는 필수로 챙겨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성이재(590m)를 넘어 함양까지만 내려오면 이제 보급을 할 수 있는데 밥 생각은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너무너무 추웠다. 가민이 보여주는 온도가 3도 위로 올라가지 않은 지는 이미 한참이 됐다. 동계용 복장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경량 바람막이만 챙겨 온 것은 아주 큰 판단 미스였다. 재킷이나 패딩을 챙겼어야 했다.
봉크로 인한 무기력, 추위와 졸음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함양까지 정신 똑디 차리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와이프 덕분이었다. 늦은 새벽 시간이었지만 와이프가 전화 너머로 말동무가 돼 준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달리다 함양에 들어오니 건물의 불빛들이 신기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뭔가 현세로 돌아온 느낌이다. CP12(함양 세븐일레븐 03:41 인증)에서 인증을 마치고 다시 출발을 하려니 추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와이프에게 추워도 너무 춥다고 하자 그냥 숙소에서 쉬었다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카카오맵 톡친구 위치공유' 기능으로 내가 어디 있는지 파악이 가능했기에 와이프가 실시간으로 지도를 보고 근처의 모텔로 길안내를 해줬다. 나는 손이 얼어서 도저히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CU함양한들점 맞은편에 있는 용호모텔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에 용호탕이라고 적혀있고 모텔이라고는 안 적혀 있어서 근처를 수 차례 배회하며 얼어 죽겠다고 징징댔는데 설마 그 건물이었을 줄이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텔에 들어가 사장님께 잠깐 쉬다 갈 거라고 말씀드렸지만 대실은 안된다고 해서 방을 하나 통째로 잡았다. 모텔비 3만 원을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니 그때는 크게 비싸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자전거는 현관에 던져놓고 잘 움직이지 않는 팔과 손으로 허둥허둥 탈의를 하고 화장실로 직행해 온수를 틀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확 녹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절수 샤워기라 물이 너무 가늘게 나와 몸에 불이 나야 되는데 속에 불이 났다. 어쨌건 얼어 죽을 뻔하다가 목숨은 부지한 듯했다. 모텔비가 아까워서라도 오래 쉬다 가고 싶었지만 현재 페이스가 느린 건지 빠른 건지 당최 가늠을 할 수 없어 1시간 정도만 취침을 하기로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단잠을 잤다.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면서도 다시 저 추위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너무 싫었다. 그래도 체온을 확 올린 상태에서 나가니 한동안은 괜찮았다. 바로 지안재, 오도재를 넘어야 했기에 보급이 필요했는데 안타깝게도 속은 여전히 뒤집어져 있어 CU에서 돼지바 하나만 겨우 삼키고 출발했다.
1시간의 대휴식으로 몸 상태가 좋아진 상태였음에도 오도재는 높디높은 장벽이었다. 아마 가장 힘든 구간을 꼽자면 바로 이곳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왔다 갔다 바느질도 섞고 너무 힘들 땐 내려서 쉬었다 가기도 했다. 좀체 줄지 않는 남은 거리에 멘탈이 무너지지 않도록 가민의 클라이밍 프로 페이지도 잠시 돌려놓고 땅만 쳐다보며 꾸역꾸역 올라갔다. 고경사 업힐의 장점이라고 하면 이 추위 속에서도 금세 체온이 오른다는 점이었다. 새벽의 고요함 속에 CP13 오도재(05:50) 업힐을 마치고 60km 뒤의 다음 CP를 향해 달려 나갔다.
여원재(480m)를 넘어 밤재(490m)로 가는 중에 날이 밝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굉장히 피곤했는데 날이 밝아오니 생체 리듬 때문인지 몸이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식욕은 여전히 없어 가져온 파워젤을 한 시간에 한 포 씩 뜯으며 진행했고, 기온이 영하를 찍었을 땐 편의점에서 핫팩을 사보기도 했지만 크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날따라 아침 안개가 심하게 꼈고 밤재 구간 쪽으로는 대형 트럭이 많이 다녀 무섭기도 했다. 다만 바짝 긴장한 덕분인지 집중력이 올라가 페이스는 점점 좋아졌다. 드디어 CP14(08:54) 광의마트에 도착. 다른 건 몰라도 이곳에 3시간 전에 도착하면 완주에는 무리 없다는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단 완주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코스도 종반에 접어들었고 원래 업힐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삼재(1,070m)는 꽤나 즐겁게 올라갔다. 기어를 다 털어도 다리를 소모시키는 고각 업힐만 아니면 된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줄어드는 남은 거리와 적립하듯이 쌓이는 해발고도는 지루함을 잊게 만들었다.
지리산 초반 업힐을 마치니 안개가 걷히며 푸르고 쨍한 하늘이 펼쳐졌다. 아침 안개가 심하면 날이 좋다더니 사실인가 보다. 마지막 업힐에서 좋은 날씨를 선물로 받은 것 같아 어깨가 들썩들썩, 고진감래인가! 이 고생도 곧 끝이 난다. 성삼재를 올라 CP15 인증(10:36)을 하고 남은 시간을 보니 이제 완주에 대한 걱정은 100% 사라졌다. 성삼재 경치를 바라보며 마지막 보급으로 허쉬 초콜릿 우유를 쪽쪽 빤 뒤 다시 출발했다. 짧긴 하지만 성삼재 다운힐(대략 7, 8분?)에서 다리를 잘 풀어준 뒤 라스트 업힐을 맞이했다. 열량 부족에 다리도 탈탈탈 털린 상태여서 케이던스 65 정도만 유지한 채 뽈뽈뽈 올라갔다.
보인다! 드디어 정령치(11:31 완주) 도착이다. 이전에 역방향으로 올라온 적이 있어 기억하는 저 비석의 모습이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너무 반가웠다. 얀에게 인증 사진을 보내니 두 번의 DNF 끝에 완주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며 삼삼한 위로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
첫 완주로부터 1년의 제한 시간, 그 카운트 다운이 이제 시작됐다. 첫 단추를 잘 꿰야하는데 두 번이나 미끄러지고 시작된 이 챌린지가 22년도에 무사히 마무리 지어질지 모르겠지만 결과가 어땠든 내 자전거 인생에 큰 의미를 가져다 주리라는 확신이 든다. 코로나 시국이라고 좋아하는 여행도 못 다녀 다소 울적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코리아 란도너스에서 이따금씩 챌린지를 신설해 모티베이션 유지에 큰 도움을 줘서 감사했고, 그중에 최고 난도라 불리는 백두 챌린지에 첫 발을 디딘 것은 그중에서도 각별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남은 백두 코스는 어떨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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