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광주600

이상하게 내가 달리기만 하면 역풍과 악천후가 일상처럼 느껴지던 브레베. 그 시작을 알린 200K 때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액땜을 제대로 한 덕분인지, 이후 이어진 300K와 400K, 그리고 대망의 600K까지 모두 최고의 날씨 속에서 치를 수 있었다. 그 여정의 피날레는 단연 광주 600K였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 아래 대회가 시작되었으나, 흐드러지게 날리는 꽃가루 탓에 완주 후 심한 눈병을 얻고 만 것은 한 편의 희극 같은 결말이었다.
브레베 시작을 앞두고 해프닝이 있었다. 최근 부쩍 나와 함께 잠자는 날이 많아진 아이가 깰까 염려되어 스마트폰 대신 가민 워치의 진동 알람을 설정해두었는데, 오전과 오후 설정을 착각하는 바람에 늦잠을 자고 만 것이다. 쎄한 기분에 눈을 뜨니 창밖은 이미 밝아 있었고, 시계는 출발 시각을 고작 20분 남겨둔 5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광주까지의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출발 자체가 불투명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다행히 평소 친분이 있던 빈 님께 급히 도움을 요청하여 늦게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말씀드려 배려를 받았고, 부랴부랴 자전거를 차에 싣고 달려 오전 7시가 되어서야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의 지연이었지만, 문 사이에 끼워진 브레베 카드를 수령하고 면책동의서를 그 자리에 끼워놓고 검차 사진을 찍어두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출발이 늦어진 덕에 공기는 이미 태양빛으로 훈훈해져 달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으나, 그만큼 야간 주행의 비중이 늘어날 것이라는 부담이 뒤따랐다. 심리적인 압박감을 털어내기 위해 속도를 늦추지 않고 CP1을 거쳐 120km 떨어진 CP2를 향해 나아갔다. 첫날 코스는 평탄하여 티티바에 몸을 기대고 항속을 유지하기 좋았으나, 강진만 부근에서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홀을 밟으며 다년간 누적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티티바에 크랙이 가며 파손된 것이다. 익스텐션 봉이 깨지고 나사산이 뭉개져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흔들리는 티티바는 극심한 주행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해남 북평면에 도착해 식당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케이블 타이로 응급 처치를 해보았으나, 흔들림만 겨우 잡았을 뿐 사용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남은 거리가 많은데 티티바 사용 불가로 허리가 불편하지 않을지 걱정됐지만, 목포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이대로 버티기로 했다. 슬슬 동료 랜도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한참을 나아가던 중, 멀리서 자전거 여행자로 보이는 한 분을 마주했다. 그래블 바이크에 리어랙 가방까지 설치한, 제법 연배가 있어 보이는 외국인이었다. 유유자적하게 남해를 누비는 여행객이라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따봉을 날리자, 그분 또한 파이팅이라며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해 주셨다. 그런데 주행과 휴식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그분과 조우하게 되었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껴 자세히 살피니 놀랍게도 브레베 참가자셨다. 엄청난 토크 위주의 주행을 이어가시던 그분은 나중에 스트라바를 통해 확인해 보니 역시나 대단한 이력을 가진 라이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눈에 익숙한 브레베 질레를 입은 분들을 몇 분 지나쳐, CP2인 송지를 통과했다. 진도로 진입하기 직전, 울돌목 입구 앞의 CU 편의점에서 위장이 완전히 기능을 멈추기 전에 최소한의 연료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사실 CP2 도착 직전 정류장에서 이미 한 차례 누워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랜도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인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쉬고 싶어진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참가자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다시 만난 제이슨 님을 비롯해 멀리 제주도에서 오신 분까지 계셨다. 연유크림빵을 입안으로 밀어 넣던 중, 옆 식당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광주 300부터 인연이 이어진 조연홍 님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주행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속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10분만 더 누워 쉬기로 하고 먼저 보내드렸다.
CP3를 지나 진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하며 낙타등 코스를 뚫고 나아가던 중, 드디어 조연홍 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던 제이슨 일행과 거의 맞닿아 주행 중이셨다. 연홍 님과 팩을 이룬 후 팽목항까지 매끄럽게 주행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곳 팽목항에서 출발 전 곤경에 처한 나를 구조해 주었던 빈 님을 운명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반가움이 섞인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다시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작별했지만, 이것이 첫째 날 빈 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팽목항 이후로는 쏟아지는 졸음 탓에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식욕마저 전무했기에 이제는 오로지 지방 대사에 의존해 에너지를 끌어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페이스가 썩 좋지 못해 연홍 님이 계속 동행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결국 목포까지 긴 여정을 함께하게 됐다. 컨디션이 저하된 200km 지점부터는 무척 자주 쉬었음에도 나의 불규칙한 리듬을 묵묵히 받아주셔서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컸다. 중간에 갈증을 이기지 못해 인근 횟집에서 병 콜라 하나를 구매해 들이켰는데, 첫 모금의 청량함은 기가 막혔으나 그마저도 위장이 거부해 절반도 채 마시지 못했다. 그나마 들이킨 약간의 당분 힘으로 솔라시도 대교를 넘었고, 저 멀리 보이는 목포와 남악의 불빛이 언제쯤 닿으려나 가늠하며 하염없는 주행을 이어갔다. 잦은 휴식 덕분에 제이슨 님과도 두세 번을 더 마주쳤고, 마침내 삼호에서 최종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숙소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밤 9시 40분경 집에 들어서니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가 나를 반겼다. 하루 만에 부쩍 자란 듯한 아이를 품에 안고 잠드는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샤워하고 빨래, 건조기까지 돌린 다음에서야 온전히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파손된 티티바를 고쳐쓸 궁리를 여러번 해봤지만 1시간 가량 삽질한 결과 결국 완전히 제거한 뒤, 둘째 날 여정을 위해 6시 40분에 다시 길을 나섰다. 티티바 없이 장거리를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그간의 브레베를 거치며 몸이 단련된 덕분인지 컨디션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무안공항으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지나 임자로 향하는 길목에서 부지런히 달리는 다른 참가자들과 마주하며 다시금 페달링에 집중력을 더했다. 여기서 최초로 조우한 것이 빈님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다들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신 것인지, 남은 거리로 역산해 보니 대부분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는 출발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나마 늦게 출발한 축에 속했던 제이슨 님과는 둘째 날에도 자주 마주치며 길을 이어갔고, 경관이 아름다운 490km 지점의 CP9 동호 해수욕장에 다다를 즈음에는 앞서가던 다른 라이더들의 모습도 하나둘 포착되기 시작했다.
CP10인 고창 이마트24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번 브레베 중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경험했다. 나 역시 이곳에서 한 번쯤 쉬어가야 할 시점이었으나, 작은 편의점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듯해 조금 더 이동하여 인근 CU 편의점에 자리를 잡았다. 라면 한 그릇으로 보급을 시도했지만, 낮 동안의 더위와 컨디션 난조 탓에 억지로 밀어 넣은 것이 겨우 3분의 2 수준이었다. 대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입에 물고 열기를 식히며 나아가니, 신기하게도 컨디션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평소 주행 중 물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인데, 고질적인 속 쓰림이 혹시 더위와 수분 부족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무튼 그 아이스크림이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어준 덕분에 내장산 CP까지 무사히 주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장산 CP에 도착하니 고창에서 뵈었던 노드바 님께서 다시금 반갑게 맞아주셨다.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참가자들은 빵과 음료를 권하며 랜도너 특유의 깊은 배려를 보여주셔서 감사했지만, 몸이 원하지 않은 타이밍에 섭취했다가는 속이 꼬일까 염려되어 정중히 사양하고, 대신 남은 거리를 무정차로 주파하기 위한 최후의 카페인 도핑을 선택했다. 시원한 얼음 컵에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신 뒤 화장실까지 들러 몸을 가볍게 비우고 마지막 출발 채비를 마쳤다.
내장산은 평소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업힐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기 수월할 뿐만 아니라 경치 또한 일품이라 마음의 안식처 중 하나로 꼽는 장소다. 특히 이곳에서 열리는 내장산 그란폰도에 1회부터 3회까지 모두 참가했던 터라 감회가 더욱 남달랐다. 2회차 당시 종합순위 1위를 달성하고, 3회차 때는 종합 및 구간 2위로 포디움에 올랐던 기억이 선명한데, 동일한 구간을 600km 라이딩의 후반부에 오르는 기분은 또 다른 의미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업힐 구간에서 다시 만난 제이슨 님이 갑자기 폭발적인 힘으로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값진 경험이었다. 랜도너스계의 레전드다운 주행이었고, 상당한 체격을 유지하면서도 뿜어져 나오는 그 엄청난 저력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정상에 먼저 도착해 일행을 기다리던 제이슨 님에게 마지막 경의의 표시로 따봉을 날린 뒤, 나는 이제 목적지를 향해 온존 모드를 버리고 본격적인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마침 바람도 뒷바람 기조로 바뀌어 속도를 내기에 최적이었고, 덕분에 운암MTB까지의 남은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드는 듯했다.
완주 후, 지난번 새벽 도착 탓에 구매하지 못했던 400K 메달과 이번 600K 메달을 나란히 손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 메달 박스에 새로운 메달들을 꽂아 넣으며, 한참 뒤에 있을 SBS(서울-부산-서울) 대회를 기다려야 하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 보았다. 이제 다시 평범한 가장의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마인드셋을 가다듬는다. 올해의 슈퍼 랜도너 달성을 스스로 자축하며, 뜨거웠던 600K의 기록을 여기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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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ominton
WriterCycling × Badminton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