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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도너스/2026 랜도너스 | 2026. 4. 12. 12:18

2026 광주400

완주 로그

 

200K와 300K를 단계적으로 넘어서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벽이 바로 400K다. 무박 진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600K는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 있으나, 400K는 야간 라이딩 시간이 필연적으로 길어지기에 심리적인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400K는 아무리 빨리 귀가해도 가족들이 잠든 시간일 것이기에, 완주 시점을 다음 날 아침 7시 정도로 잡아도 충분할 만큼 시간적 자유도가 높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루 종일 마음껏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였다. 더욱이 광주 400K는 출발 시각이 오전 8시여서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나설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출발지에서는 지난 200K 때 뵈었던 조연홍 님, 빈 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멀리서 찾아온 빡무 님과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다들 꾸준히 운동을 해온 덕분인지 건강미가 넘치는 모습이었으나, 바뀐 것은 감퇴한 내 기량뿐인가 싶어 씁쓸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참가자 전원이 모여 단체 사진을 찍을 때는 이만큼의 인원이 광주 브레베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출발지에 고인물들 대거 출현

 

대망의 출발 직후,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찰나 눈앞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눈앞의 그룹이 팩을 이뤄 주행하던 중 갓길에 정차해 있던 차량의 운전자가 갑자기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큰 충돌 소리에 간접적인 고통이 전해질 정도였고, 피해를 입은 라이더는 고통이 심한 듯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한동안 누워 있었다. 인근 행인이 즉시 119에 신고를 했고, 나 또한 구급대원이 도착하여 대응하는 과정을 지켜본 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길을 나섰다. 사고 대응으로 17분 정도가 지체되었으나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날이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담양을 지나 400K만의 새로운 경로에 진입했을 때는 벚꽃이 많이 져 있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400km라는 광활한 지역을 커버하는 코스답게 군데군데 만개한 벚꽃 명소들이 나타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남기며 모처럼 여행하는 기분으로 브레베를 즐길 수 있었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순조롭게 달리던 중, 정차해 있던 김영삼 님 일행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으나, 가민 설정을 잘못 건드려 코스 지점(Waypoints) 안내를 꺼둔 상태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CP1을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다.

 

​옥정호 그란폰도와 겹치는 구간을 지나 한참을 더 진행하고서야, 문득 체크포인트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경로는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결국 7km 가량을 왕복하며 되돌아와야 했지만, 오늘 달릴 수 있는 거리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다시 즐겁게 주행을 이어갔다.

 

되돌아온 CP

 

 

다음 CP인 임실을 향해 가는 길, 옥정호 인근의 벚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반대편 차선에서 진지하게 그란폰도 레이스에 임하는 라이더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덩달아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주행 중 계측 라인과 사진작가를 발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정말로 내 사진이 찍혀 있었다. 아니, 공짜 사진이라니. 동부MTB 카페에 가면 본인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광주 400K 코스의 혜안 가득한 알찬 구성에 새삼 감탄하게 된 순간이었다.

 

CP2 임실에 도착한 뒤 식사 장소를 찾았으나, 컨트롤포인트 전에 식당가가 많았지 지난 후에는 전무했다. 허기가 졌지만 주행을 계속하던 중 오수 초입에서 편의점을 발견하여 라면과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했다. 다시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서 분홍색 질레를 착용한 라이더가 보였다. 추월하려는 찰나 확인해 보니 출발지에서 인사를 나눴던 조연홍 님이셨다. 페이스를 맞춰 함께 가기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선두에서 바람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후 김영삼 님 그룹과 합류하여 4인의 팩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정비 중인 도로를 지나던 중 조연홍 님의 체인이 이탈하며 이윽고 체인 링크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들 해결책을 강구했으나 기어 단수가 달라 임시방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도 같은 11단이었지만, 체인링크는 들고 다니지 않아 도움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수소문하여 남원 쪽에 재고가 있는 샵을 찾아 택시로 새 체인을 받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도 지나가던 제이슨 일행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 무슨 일이냐며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정말 감동이었다. 본인은 12단이지만 기억에 11단 스페어도 있었던 것 같다며 새들백을 뒤져가며 기어코 부품을 찾아내 건네주는 랜도너들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다음 목적지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동부MTB에 올라온 사진 ㅋㅋ 진짜로 있다니
첫 끼니이자 제대로된 마지막 끼니 ㅠㅠ
부품을 찾고 있는 제이슨 일행
받은 링크를 체결 중이심!

 

CP3인 CU편의점에는 이미 많은 참가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확 높아진 낮 기온 탓에 식욕이 떨어져 가벼운 보급만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공북리 마을회관으로 향하던 중 빈 님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하필 갈림길 직전이라 의도치 않게 코스 이탈을 유발하게 되어 무척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조용하고 울창한 숲길을 지나며 코스가 무척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각자의 페이스로 헤어졌다. CP4를 지나 송광사로 향하는 길은 상행은 좋았으나 하행 일부분이 비포장 구간이라 노면이 좋지 않았으나, 주변 화장실, 식당 등 편의시설을 고려한 설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 많은 빈 님과 한 컷!
무정차 CP 통과
송광사 CP 도착

 

해가 지기 전 겸백 CP를 통과하며 속도를 높이려 했으나, 보급 부족으로 인해 봉크 증세가 나타나며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복내 사거리의 식당에서 간짜장 곱배기를 주문했으나 속이 좋지 않아 거의 먹지 못하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결코 맛이 없어서 남긴 것이 아니라며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죄송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오니, 제이슨 일행이 좀 더 바로 근처에 있던 올드한 중국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뒤로 빈 님의 모습이 얼핏 보여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고 말았다.

 

지금 보면 군침 돋는데 거의 먹질 못했다. ㅠㅠ
위장운동이 안되고 있다는 친구 진호의 어드바이스로 유거트를 사서 등에 꽂고 다님 ㅋㅋ

 

다시 고독을 곱씹는 솔로 라이딩이 시작되었고, 눈으로는 쉴 새 없이 노상 취침이 가능한 장소를 물색하며 달렸다. 수문리 해수욕장 CP는 바람을 막아줄 마땅한 구조물이 없어 그대로 통과했고, 이후 수양교 인근에서 도로와 적당히 거리를 둔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회관을 발견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40분 정도 눈을 붙였다. 깨어났을 때는 식은땀 탓에 오한이 느껴졌으나,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금세 체온이 돌아왔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는 상태임에도 일정한 출력을 유지하며 전진하는 스스로를 보며 인체의 신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이 지구 최강의 지구력을 바탕으로 인류를 발전시키고 생존을 이어오지 않았던가. 비어버린 위장과 달리 쉼 없이 움직이는 두 다리에서 인류 공통의 본능적인 강인함을 엿본 기분이었다.

 

잠깐 쉬었다 가기에는 마을회관만한 곳이 없다. 버스정류장은 눈부심 때문에 비상시에만 이용!

 

드디어 익숙한 영암 지역에 진입했다. 평소 소방검사 업무차 영암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터라, 주행하는 내내 마주하는 풍경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코스를 따라 달리다 보니 로컬들만이 알 수 있는 숨은 길들을 정교하게 연결해 놓은 설계자의 정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천황사 인근을 지날 때였다. 낮에 보았다면 월출산의 웅장한 자태가 일품이었을 텐데, 대부분의 라이더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비경을 놓치고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이 지역 주민으로서 내심 안타깝게 느껴졌다.

 

영암 터미널에 도착하니 내부에 위치한 이마트24 편의점에서 이미 많은 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곳이라, 지역 화폐인 월출페이로 결제를 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완주를 위해 무엇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라면과 에너지 드링크를 구매했으나, 위장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탓에 서너 젓가락조차 넘기기 힘들었다.

 

음식 대신 선택한 것은 휴식이었다. 다행히 터미널 대합실에 마련된 벤치는 성인 남성이 몸을 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크기였고, 그간의 고단함을 잊게 할 만큼 안락한 쿠션감까지 갖추고 있었다. 결국 그곳에 누워 2시간 가까이 깊은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체력 회복을 대신했다. 대합실이 넓어 다소 쌀쌀하긴 했지만 찬바람을 피해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그 벤치는 당시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비상약으로 챙겨온 소화제 오타이산을 복용한 덕분인지, 아니면 충분한 휴식 덕분인지 컨디션이 눈에 띄게 호전됨을 느꼈다. 터미널을 나서기 직전, 대합실 벤치에서 나 말고도 몸을 뉘어 휴식을 취하던 또 다른 남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빈 님이었다. 터미널을 나선 직후 그와 다시 조우하여 시종까지 한동안 함께 이동하게 됐다. 칠흑 같은 야밤의 고요한 길을 누군가와 함께 불빛으로 밝히며 달리는 행위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영암버스터미널 안 편의점에서 많이들 보급을 하고 떠나는 모양
마지막 CP인 몽탄역

 

 

이후 남은 거리는 마치 도로 전체를 전세 낸 듯 고요한 어둠 속을 질주하는 재미에 온전히 집중했다. 과거 훈련 삼아 수없이 오갔던 영산강변 도로를 지날 때는 감회가 새로웠으나, 짙게 깔린 안개와 적막한 어둠이 어우러져 평소와는 전혀 다른, 오싹함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주에서 광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가민의 경로를 착각하여 길을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두 차례 정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바닥 고인물이자 레전드인 제이슨 님 또한 경로를 착각해 되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나만 겪는 시행착오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운암MTB에 도착하여 완주 서명을 마칠 수 있었다.

 

길었지만 짧게 느껴진 여행이었다. 이번 400K를 발판 삼아 다가올 600K는 더욱 즐겁게 만끽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번 후기를 마무리한다.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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